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읽는 즐거움

비행운 - 김애란

오후의하루 2022. 3. 12. 15:52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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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애란의 세번째 소설집 '비행운'
 
내 마음을 들킨 기분이다.
읽는 내내 뜨거운 침을 삼켜야했고,
작가의 시선과 통찰력, 그리고 그 아프고도 아름다운 문장력에
연신 감탄했다.
 
왜 난 아픈 소설을 읽으면서
위로를 받는가.
 
 
 

 

_
 
작년에는 정말 많은 옷을 샀다. 계절별로, 유행 따라, 기분대로.
그만한 경제력이 있었고 새삼 예쁘게 입는 즐거움을 발견해서였다.
옷 사면 사람 만나야 하고, 사람 만나면 술 마셔야 되고, 술 마시면 실수하고,
실수하면 후회하게 되리란걸 알았지만.
그런 패턴조차 내가 사회적인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.
너의 여름은 어떠니. p10
 
여름옷은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다. 보자마자 모두 흥분해서 산 것인데 이상했다.
유행은 왜 금방 낡아버리는지.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,
쭈글쭈글 함부로 쌓인 옷더미가 내 남루한 취향과 구매의 이력처럼 느껴져 울적했다.
너의 여름은 어떠니 p11
 
사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닌
인간의 복잡함과 울퉁불퉁함을 잘 헤아릴 줄 아는 남자라는 것 역시 뒤늦게 깨달았지만.
너의 여름은 어떠니 p12
 
나무는 대낮에도 검은 실루엣을 드리우며 서 있었다. 이국의 신처럼 여러 개의 팔을 뻗은 채, 두 눈을 감고ㅡ
그것은 동쪽으로 누웠다 서쪽으로 휘기를 반복했다. 그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포식자를 피하는 물고기 떼처럼 쏴아아 움직였다.
천 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.
천 개의 방향은 한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. 살아 남는 것. 물속 골리앗 p85
 
"그러니까 제 말은요. 그렇게 우연히 노래랑 나랑 만났는데, 또 너무 좋은데, 나는 내려야 하고,
그렇게 집에 가면서, 나는 그 노래 제목을 영영 알지 못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."
용대가 물었다.
"그럼 다 듣고 내리지 그랬어요."
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.
"그런데 감동적인 음악을 들으면요, 참 좋다, 좋은데, 나는 영영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을 거라는,
바로 그 사실이 좋을 때가 있어요."
그 곳에 밤 여기에 노래 p147
 
“월급날에 대한 확신과 기대는 조금 더 예쁜 것, 조금 더 세련된 것, 조금 더 안전한 것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.
그러니까 딱 한 뼘만……. 9센티미터만큼이라도 삶의 질이 향상되길 바랐다.
그런데 이상한 건 그 많은 물건 중 내게 ‘딱 맞는 한 뼘’은 없었다는 거다.”
이 모든 건 늘 반 뼘 모자라거나 한 뼘 초과됐다.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.
아직 젋고, 별 날이 많다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한 뼘 더 초과되는 쪽을 택했다. 그리고 그럴 자격이 있다 생각했다.
큐티클 p214
 
“너 나 만나서 불행했니?”
그러곤 곧장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. 저쪽에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.
초조해진 서윤이 황급히 변명하려는 찰나 경민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.
“아니.”
“……”
“그런 거 아니었어.”
“……”
“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……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.”
'호텔 니약 따' p.277

 

그런데 언니,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.
'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.... 겨우 내가 되겠지.'
서른 p297
 
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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